작성자 : 겨울
총을 쏘면 맞는 사람이 있고 사랑을 고백하면 승낙하거나 거절하는 사람이 있다. 리액션 숏, 행위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숏은 대개 그 존재에 대해 크게 의문을 품지 않을 만큼 보편적이다. 일상 속에서 누군가의 반응을 두고 ‘리액션이 좋다’라고 평할 만큼. 그러고 보면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늘 리액션이 어떻게 보일지 의식한다는 점에서 항상 카메라 앞에 서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세상이 영화가 될 거라는 말이 이러한 디스토피아를 의미했던 걸까.
하지만 영화 [페일 라이더](1985)에서는 리액션 숏이 종종 부재한다. 그리고 그 부재는 어김없이 숏의 주인이 배우이자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일 때 두드러진다. 그는 누군가 총을 쏘려고 하면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사라지고, 누군가 진심을 말하려 하면 뱀파이어처럼 어둠 속에 숨어 좀처럼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숏이 사라지는 순간 의문이 생긴다. 리액션 숏의 기능은 무엇인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무엇으로부터 도피하고(혹은 맞서고) 있는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사라진 리액션 숏의 자리를 채우는 주인은, 그가 지키려는 마을 사람들 혹은 복수하고자 하는 악당들이 된다. 누군가는 그를 의심하거나 존경하는 얼굴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또 누군가는 그가 쏜 총에 맞고 고통스러워한다. 영화 속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기한 목사의 캐릭터는 이러한 리액션 숏들의 중첩을 통해 완성된다. 여기서 우리는 리액션 숏의 기능 중 하나를 알 수 있다. “리액션 숏은 행위하는 자를(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행위를) 돋보이게 한다.”
그런데 리액션을 통해서 주인공의 행위를 돋보이게 하는 장르가 있지 않나? 영웅의 행위에 군중과 악당들의 리액션 숏을 촘촘히 겹치면서 그/그녀에게 당위와 신성함을 부여하는 장르. 슈퍼 히어로물 말이다. 그래선지 언뜻 [페일 라이더]는 일종의 영웅물로 보이기도 한다. 마블 캐릭터처럼 다소 장난스럽게 과장된 거구의 악당(컬브)이 있고, 그들에 의해 폐허가 된 공간이 무대가 되며, 과묵하고 신비한 영웅(목사)은 소녀를 구하고 공동체를 지켜낸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식의 구분에는 어딘가 찝찝함이 남는다. 영화를 보고 있자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행위의 주인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순간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목사는 자신을 죽이려는 일곱 명의 보안관을 처치하기 위해 읍내에 도착한다. 창문을 통해 그의 등장을 목격한 보안관들은 문을 열고 거리로 나선다. 하지만 그들이 마주하게 되는 건 그가 아닌 바닥에 살포시 놓인 그의 모자일 뿐이다. 사라진 몸. 행위의 주인을 찾기 위해서 읍내를 뒤지는 보안관들은 그림자 속에서 불쑥 나타나는 그에게 한 명씩 차례로 죽어 나간다. 여기서 관객은 목사가 총을 쏘는 행위가 아닌, 그의 총을 맞고 쓰러지는 보안관들의 리액션 숏을 본다. 마지막 라이벌인 스톡번과의 대결 씬조차 목사의 얼굴은 그가 푹 눌러쓴 모자에 의해 절반쯤 가려져 있다. 마침내 그림자 속 목사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스톡번은 얼어붙고 마는데, 이때 그는 서부극이라면 총잡이가 마땅히 받아야 할 권리, 홀스터에서 권총을 빼낼 권리조차 빼앗긴 채 목사의 총에 죽고 만다. 그러니 스톡번은 목사의 행위로 인해 죽었다기보다 행위의 박탈로 인해 죽었다고 함이 마땅할 것이다. 이렇듯 행위의 순간조차 그는 계속해서 사라진다.
행위(액션)의 주인을 제대로 보기 위해, 오로지 행위하는 자만이 존재하는 곳을 찾아볼까. 시인 이상이 썼듯 내가 오른손을 내밀면 왼손을 내미는 공간. 반전된 행위만이 낯설게 존재하는, 소리가 없는 조용한 세상인 거울 속. 이는 [페일 라이더]에서 어떻게 표현되는가.
목사가 마을에 도착하고 훌이 내준 방에서 옷을 벗자 화면을 가득 채우는 건 어둠 속에서 빛나는 그의 등이다. 관통상으로 보이는 흉터들을 무심히 비추던 카메라는 목사의 시선을 따라 창문 너머 마을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비추더니 거울을 향해 패닝 한다. 드디어 행위의 오롯한 주인을 만날 시간. 하지만 이때 거울 속에 비친 목사의 얼굴은 사람이라 하기엔 주저하게 된다. 빛이 거의 닿지 않는 탓에 한쪽 눈과 턱만 간신히 보이고 이마저도 클린트 이스트의 굴곡진 광대로 인해 진한 음영이 생긴다. 차라리 해골의 가까운 형상. 거울 밖에 분명 존재해야 하는 그의 머리 역시 (그림자 속에) 잘려 버리고 없다. 행위의 텅 빈 자리, 죽음이다.
페일 라이더. 목사가 묵시록의 네 번째 기사인 죽음을 은유함을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드러내고 시작한다. 목사가 처음 말을 타고 등장하는 순간, 창문을 통해 그를 목격한 사라가 듣게 되는 문장은 그녀의 딸 메건이 미리 읊고 있는 요한 묵시록이다.
“내가 또 보니, 푸르스름한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이의 이름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저승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리액션 숏이 부재하는 이유를 단순히 ‘죽음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기엔 주저하게 된다. 우리는 다양한 영화 속에서 리액션 숏의 자리에 서는 유령을 볼 수 있다. CG를 통해서든 분장을 통해서든 말이다. 영화 속에선 죽은 사람도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다. 그러니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리액션 숏을 거부하는 데는 여전히 다른 이유가 있어 보인다. 이제 그를 기어코 리액션 숏의 자리로 끌고 오려는 두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죽음으로서의 그의 도착을 예언하고 목격한 사람, 메건과 그녀의 어머니 사라에 대해서.
깊은 밤, 메건은 목사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목사는 아직 미성년인 그녀의 마음을 받을 수 없다고 부드럽게 거절한다. 이때 목사의 얼굴은 거울 앞의 죽음처럼 어둠 속에 절반쯤 가려져 있다. 자유롭게 앞뒤로 움직이며 설득하려 들고 화를 내고 또 저주를 퍼붓는 메건의 얼굴은 빛과 어둠을 자유롭게 오간다. 하지만 목사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상처받은 메건이 홀연히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서 있는다. 어둠 속에 어린 아이를 혼자 내버려둘 수 있을 정도로 마을은 안전한 곳이 아님에도. 그는 마치 떠밀려 온 사람 마냥, 리액션 숏의 자리에 어색하게 서서 반응하기를 최대한 거부한다.
낮이지만 칠흑처럼 어두운 방으로 사라가 들어온다. 그녀 역시 품고 있던 마음을 이야기한다. 목사는 전과 마찬가지로 대화를 통해, 사라가 왜 자신이 아닌 훌을 선택해야 하는지 설득한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이번에도 지나칠 정도로 경직되어 있다. 어둠 속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 딸인 메건과 달리 사라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조명을 등지고 있는 그에게 바짝 다가가가 선다. 목사의 얼굴은 역시나 그림자에 가려져 있고 사라는 그의 검은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까치발로 선다. 그는 여전히 뻣뻣하게 굳어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고, 그림자는 이제 그녀의 얼굴마저 까맣게 물들여 버린다. 얼굴이 사라진 두 사람의 입맞춤.
그리고 바깥에서 목사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사라는 놀라 문밖을 바라보지만 목소리의 주체는 보이지 않고, 눈 쌓인 풍광 위로 형체가 없는 소리만이 프레임 안팎을 자유롭게 드나든다. 그는 이를 ‘과거로부터의 목소리’라고 표현한다. voice from the past. 소리는 굳어 버린 그의 몸과는 반대로 제약 없이 공간과 시간을 넘나들 수 있다. 하지만 소리와 반대되는 몸. 카메라 앞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몸.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한 발짝이라도 떼면 밝은 조명 아래 맨얼굴을 드러내야 하는 이미지로서 몸. 자유롭게 사라졌다 나타났던 목사,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몸은 사랑을 고백받는 순간 멈춘다. 그래야만 얼굴이 가려질 수 있기에. 얼굴을 가려야만 그는 죽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다르게 이야기하면 어둠 속을 벗어나면, 리액션하면 그는 살아날 것이다.
여기서 리액션 숏의 진정한 기능을 알 수 있다. “리액션 숏은 존재를 보장한다.” 거기엔 별다른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 리액션 숏이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행위하는 존재와 반응하는 존재 모두 당연한 것이 된다. 그저 액션 – 리액션으로 연결 지어질 뿐이다.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를 끊어버린다. 리액션 숏을 거절함으로써 살기를 거부한다. 그는 죽기 위해, 리액션 숏의 주인이 되지 않기 위해, 유령이 되기 위해 편집의 연쇄를 끊고 빛이 닿지 않는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긴다.
한때는 당연한 것이 그렇지 않게 될 경우 우리는 상실을 경험한다. 누군가를 리액션이 좋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닌, 그의 리액션 자체가 사라질 때 두려움에 빠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람들은 무(표정)를 견디지 못한다. 그렇게 리액션 숏의 또 다른 기능을 도출해 낼 수 있다. “리액션 숏은 사라짐으로써 객체에서 주체의 자리를 부여받는다.”
사라진 숏의 자리에서 쉽게 해석할 수 없는 유령이 출몰하는 곳. 이제 관객에게 영화(관)는 더는 안전한 장소가 아니다. 함부로 사랑하려 드는 순간 사라의 얼굴이 사라진 저 숏처럼 관객 역시 ‘무’가 될 것이다. 언젠가 세상이 영화가 된다면, 이러한 위험이 도사리는 세상이야말로 클린트 이스투드가 원하는 곳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리액션이 객체로서 존재하는 디스토피아가 아닌, 주체로서 유령이 되는 곳. 스크린에서조차 보이지 않는 공백으로 흘러 들어가는 곳. 이는 세상을 구원하는 죽음이라는 [페일 라이더]의 역설과도 썩 잘 어울린다.
영화의 마지막, 목사가 떠난 자리에 뒤늦게 메건이 도착한다. 말에 올라타자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제지한다. 그를 따라가려고 했다간 말들을 죽이게 될 거라고. 이는 곧 네가 죽게 될 거라는 말과도 다르지 않다. 리액션 숏을 거부하는 그의 영화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음과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단 하나 몸과 반대되는 소리,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 수 있는 목소리를 제외하고. 메건은 뒤늦게 사랑한다고 외치기 시작한다. 사라진 숏의 자리에 과거로부터의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2026년 4월 30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