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수건의 기능

작성자 : 겨울

여자가 빗자루로 바닥을 쓴다. 아내가 집을 나간 뒤 늘 어질러져 있던 방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고, 남자는 출근하기 위해 옷을 입는 중이다. 영화에서 첩이라 불리는 여자는 홀로 남은 남자를 유혹하는 듯한 몸짓을 보이지만, 남자는 무시하고 서랍 속에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한다. 남자가 바닥으로 시선을 던지면, 하얀 손수건의 인서트 숏이 등장한다.

남자는 손수건의 뒤편에 서서 바라보고 있으니 POV, 시점 숏을 택한다면 손수건의 방향은 뒤집어져야 하고, 좀 더 부감 쇼트로 찍었어야 할 터이다. 하지만 감독은 사진처럼 카메라를 보다 중립적인 위치에 둔다. 중요한 건 남자의 시선이 아닌 손수건 그 자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손수건의 기능은 무엇인가?

나루세 미키오의 ‘밥’(1951)을 보며 이 쇼트를 처음 맞닥뜨렸을 때 화면 정중앙에 위치해 빛을 받고 있는 하얀 손수건을 보며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는 ‘왜 POV로 찍지 않았을까?’ 보다는, 이 영화 속에서 사물이 중심에 오는 인서트 쇼트가 꽤나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었고, 그 쇼트들이 무언가를 작동시키고 있다는 감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뚜렷이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고 사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렇다. 이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영화 속에 표현된 사물의 인서트 숏을 모두 살펴보는 방법밖에 없다.

고장난 시계. 영화에서 가장 첫 번째로 등장하는 인서트 쇼트. 남자, 하쓰노스케가 아내인 미치요에게 “시계가 또 멈췄네”라고 이야기한 뒤 미치요가 시계를 올려다보자 등장한다. 살짝 앙각으로 찍혀있긴 하지만 POV라고 하기엔 묘하다. 두 인물은 바닥에 앉아서 이를 올려다보는데 비해, 카메라를 부러 천장 높이까지 끌어올려 시계를 최대한 가운데에 위치시켰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중립적인 위치를 찾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그럼에도 이 쇼트는 어딘가 느닷없이 느껴지는데, 대화 도중 갑작스레 하쓰노스케가 시계를 언급한 것도 맥락이 없거니와 너무 정직하게 또 크게 찍힌 바람에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사람의 얼굴처럼도 보인다.

이런 식의 시선에 대응되지만 POV라고 말하기는 불명확한, 그러나 시선 바로 다음에 붙는 사물의 인서트 숏이 영화 속에서 자주 반복된다. 하쓰노스케의 상사가 그의 새로 산 하얀 구두를 바라볼 때, 하쓰노스케가 구두를 잃어버리고 다시 자신의 낡은 신발을 바라볼 때, 첩이 질투 어린 시선으로 하쓰노스케를 찾아온 또 다른 여자의 신발을 바라볼 때. 나루세 미키오는 시선에 해당하는 부감숏을 배제하고 그들의 신발을 화면 안에 정면으로 등장시킨다.

만약에 이 숏들이 POV로 찍혔다면 어땠을까 가정해 보자. 첫 번째 쇼트는 하쓰노스케의 새 구두를 부러운 듯 바라보는 상사의 감정이, 두 번째 쇼트는 구두를 잃어버리고 풀죽은 하쓰노스케의 감정이, 세 번째 쇼트는 또 다른 여자를 질투하는 첩의 감정이 강조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감독이 무엇을 피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인물이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 인물의 감정을 설명적으로 드러내는 일을 최대한 피하고 있다.

하지만 명확히 시선에는 대응되기에, 감정이 완전히 배제되었다고 보기도, 의미가 전혀 없다고 하기도 어렵다. 그저 최대한 중립적인 위치로, 첫 번째 하얀색 구두를 제외하고서는 대부분 화면 중앙에 위치시킨다. 여기서 영화 속에 인물의 클로즈업이 거의 존재하지 않음을 상기하고 싶다. 인물을 잡는 최대의 숏 사이즈가 인물의 가슴 높이, 미디엄 클로즈업에서 머무르는 영화에서 이런 식의 사물의 클로즈업은 분명 도드라진다. 그런데 어딘가 모순적이지 않나? 인물보다 크거나 동일한 사물의 클로즈업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그 사물이 중립적으로 보이게끔 하고자 하는 욕망 말이다. 대체 이런 복잡한 욕망을 가진 인서트 쇼트(시선에 대응되나 중립적이길 바라며 동시에 이미지의 크기는 큰)의 기능은 무엇인가.

그 전에 짚고 넘어갈 게 있다. 혹시 영화 ‘밥’에서는 사물을 표현하는 POV 쇼트가 일체 배제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 하지만 그렇지 않다. ‘밥’에서의 인서트 쇼트는 미치요의 시선일 때 비로소 POV로 표현된다.

위에서 첫 번째, 두 번째 쇼트는 미치요가 남편이 조카 사토코와 부적절하게 가까워진 것을 눈치채는 장면에 등장하는 인서트다. 미치요와 대화할 때는 남편이 꺼낸 적 없던 예쁜 찻잔과 조카의 머리맡에 놓여 있는 그의 재떨이가 보인다. 하라 세츠코가 연기한 미치요의 당혹스럽고 분노 어린 시선에서 즉각적으로 대응되는 사물의 부감 쇼트는 그녀의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게 한다.

세 번째 쇼트는 하쓰노스케가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온 날, 미치요가 그의 양복에서 발견한 지폐다. 쌀을 팔러 온 노파를 매몰차게 거절해야 할 정도로 집에 돈이 부족하기에 그녀에겐 반가운 소식일 수밖에 없다. 마지막은 미쓰오가 남편이 친정집에 도착했음을 알게되는 인서트 쇼트. 이 역시 정확히 그녀의 시선에 대응되는 POV다. 도쿄에서의 홀로서기를 꿈꾸던 미쓰오는 남편의 낡은 신발을 반가워하기 보다 불안해하며 도망쳐버린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다소 어색하게 찍힌 첫 번째 쇼트(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화면 속 대부분의 요소가 초점이 나간)를 제외하면 나머지 세 개의 쇼트는 어딘가 중립적인 느낌이 든다. 마치 정물화처럼 고요하게 찍힌 사물들은, 의미와 정서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했다기보다 사물 그 자체를 표현하는데 집중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쇼트들의 기능을 두고 시간을 감각하게 한다고 이야기하면 어떨까. 정물화, Still life 를 보면서 사람들이 시간 자체를 감각하듯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회화가 아닐뿐더러 사물이 화면 속에 2, 3초 정도 보인다고 하여 시간을 느낀다고 말하면 과장에 가까울 터다. 게다가 시간을 보여주는 쇼트가 영화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시간 경과 인서트로 사용되는 주전자 – 냄비 쇼트가 있다.

주전자의 연기를 다음 숏의 냄비의 연기로 대응하며 감독은 영화 속에 시간의 흐름을 드러낸다. 이를 보면 나루세 미키오는 기능적인 연출에 신경 쓰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밥을 차려놓고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시간을 표현하기 위해 비슷한 구도의 달라진 풍경을 구체적인 이미지로서 표현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시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사물을 활용했다고 말하는 건 어불성설일 것이다.

기능적인 연출이라는 점에서 다시 접근해 보자. 자신의 개성이나 철학을 뽐내기 보다, 시나리오와 그 시나리오가 담고 있는(혹은 담고 있지 못하는) 영화적 가능성을 표현하는데 충실한 연출. 이를 위해선 우선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인지로 돌아가야만 한다.

하라 세츠코의 도호 전속 첫 출연작으로도 알려진 ‘밥’은 권태기에 접어든 부부의 이야기를 다룬다. 하라 세츠코가 연기한 미치요는 도쿄에서 일을 할 만한 능력이 되지만, 오로지 남편의 뒷바라지를 위해 오사카로 내려가 가정주부를 하고 있다. 미치요는 종종 그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남편인 하쓰노스케는 우에하라 켄 특유의 줏대 없는 연기로 인해 영화 내내 무기력해 보인다. 그가 유일하게 활기를 띠는 순간은 조카인 사토코와 대화하고 외출하는 순간뿐. 두 부부는 이제 서로를 보지 않는다. 미치요는 하쓰노스케를 보기보다 허공을 보고 이야기하고, 하쓰노스케는 미치요의 등을 바라보거나 천장을 바라보며 눕는다. 불청객인 사토코는 2층에 서서 1층을 신경쓰거나, 미치요의 등 뒤에서 그녀의 감정을 가늠한다. 영화는 내내 이들의 불화하는 시선을 표현하는데 공을 들인다.

결국 미치요가 하쓰노스케를 견디지 못하고 도쿄로 가기로 선택했을 때의 장면을 보자. 영화는 방에서 마지막으로 쌀을 씻는 미치요와 그녀를 후회스럽게 바라보는 하쓰노스케를 차례로 보여준 후, 하쓰노스케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자 화면 가득 하얀색 쌀의 이미지를 인서트 숏으로 비춘다. 여기서도 두 인물의 시선은 어디에도 닿지 못한다. 미치요는 자신이 씻는 쌀을 내려다 보고, 하쓰노스케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미치요를 힐끗 본다음 또 다시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버린다. 이제 흰 쌀의 이미지는 누구의 시선이라고도 볼 수 없다. 미치요의 시선이라고 하기엔 하쓰노스케의 방향이고, 하쓰노스케의 시선이라고 하기엔 그는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흰 쌀은 그저 불화하는 시선 그 자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어디에도 머무르지 못하는 시선은 결국 사물을 향하게 된다고. 우리가 누군가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게 되었을 때 고개를 돌려 억지로 정지한 사물에 시선을 맞추는 것처럼. 그들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정지한 시계를 바라보았을 때 나루세 미키오가 표현하려고 했던 건, 고장난 시계가 아닌 결국 권태기에 다다른 부부의 시선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하는. 더는 얼굴을 마주할 수 없는 이들의 시선,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 감독은 어떠한 과장 없이 사물을 드러나게 한다. 불화하는 시선으로서의 사물 말이다.

영화 ‘밥’의 결말을 지금 2026년 현대로 가져오기에는 무리가 있다. 무능력하고 줏대 없는 남편을 떠나 도쿄에서 새 삶을 꿈꾸던 미쓰오가 결국엔 모든 걸 포기하고 오사카로 돌아와 여자의 행복은 남편을 뒷바라지 하는 일이라 읊조리는. 영화가 내포하는 전후 일본 사회의 공포와 당시 여성의 가사 노동에 대한 다층적인 해석의 여지가 있겠지만, 이는 각본가였던 다나카 스미에가 원하지 않았던 결말임에는 분명하다. 그녀는 각색 단계서부터 미치요가 이혼을 선택해야한다고 주장했고 억지 화합을 바라던 제작사와 갈등한 후 작품에서 하차한 것으로 전해진다.

나루세 미키오는 속으로 어떠한 결말을 바랐는지 우리는 모른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계속 길을 잃는 시선들과, 그 시선 자체를 표현하는 무표정한 사물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인서트 쇼트를 통해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미치요가 하쓰노스케에게 쓴 편지를 건네지 않고 잘게 찢어 열차 밖으로 흩날리는 순간. 영화 내내 정적으로 고정되어 있던 불화하는 시선이 바람 속으로 사라진다. 마침내 자유로워진다. 이 해방의 감각을 해피엔딩이라 하지 않는다면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2026년 5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