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겨울
한 소년이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다가 눈을 돌려 카메라를 바라본다. 햇살을 받은 그의 등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그 연기의 정체가 무엇인지 가늠할 무렵 소년의 나레이션이 들린다.
“나는 날아다니는 걸 좋아해. 그저 평화와 고요함 속에 홀로 있고, 주위에는 맑고 푸른 하늘뿐이니까. 귀찮게 하는 사람도 없고. 어디로 가야 한다거나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어. 날아다니는 것의 유일한 단점은 이 빌어먹을 세상으로 다시 내려와야 한다는 거야.”
소년은 다리 밑으로 몸을 던진다. 고요히 허공을 비행하는 소년은 첨벙 소리와 함께 물속으로 사라진다. 영화 「Streetwise(1984)」는 그렇게 시작한다.
소년의 젖은 등을 내리쬐는 태양 빛, 그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보다 이제 더 궁금해지는 건 소년의 시선이다. ‘빌어먹을 세상으로 다시 내려’ 온 소년은 고개를 돌려 정확히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상한 시선이 긴 세월을 지나 유튜브, 모니터 화면을 거쳐 우연히 내게 다다랐다. 나는 이 느닷없는 시선에 매혹되었고 이를 해명하기 위해 국내에 개봉된 적 없는 영화에 대해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해명하고픈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이 아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제4의 벽
“무대 가장자리에 여러분과 객석을 갈라놓은 커다란 벽(un grand mur)이 있다고 상상하십시오. 막이 올라가지 않은 것처럼 연기하십시오.”
18세기 드니 디드로가 『극시론』에서 주장했던 이 ‘커다란 벽’은 배우로 하여금 관객석을 의식하지 않고 극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지침이자 보호막이다. 이후 이는 ‘제4의 벽’이라는 용어로서 사실주의 연극의 기반이 되었고 영화에서도 흔히 쓰이는 단어가 되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커다란 벽 그 자체보다 벽을 깨는 행위에 더 관심을 가져왔다. 제4의 벽이 무너지는 순간, 연기자와 관객을 가로막던 보호장치는 사라지고 극과 현실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양들의 침묵」, 「살인의 추억」, 「퍼니 게임」 등 영화 속 인물이 카메라를 응시하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디드로의 커다란 벽이 배우에게 극에 집중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면, 영화에서 제4의 벽을 깨트리는 연출은 배우에게 전적인 수동성을 요구한다. 렌즈를 바라보라는 신호가 떨어지면 배우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척 연기하며 카메라를 향해 시선을 돌려야만 한다. 그러니 여기서 강조되어 드러나는 건 배우의 연기라기보다, 벽을 부수고 관객석과 배우를 마주 보게 하려는 연출자의 의도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Streetwise」는 다큐멘터리다. 다리 밑으로 몸을 던지는 시애틀 파이크 스트리트의 노숙자 소년 랫은 자발적으로 카메라를 바라본다. 자신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경계하는 익명의 눈빛이 아니라, 제대로 찍고 있는지 보겠다는 듯 고개를 돌려서 정확히 카메라의 위치를 확인한다. 랫뿐만이 아니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어린 노숙자 소녀 타이니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윙크를 하기도 하고, 매춘을 하기 위해 낯선 이의 차에 타면서도 카메라를 슬쩍 바라본다. 여자아이들에게 매춘을 알선하는 패트리스는 영화 내내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이다가 부모가 찾아오자 멀리서 자신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부끄럽다는 듯 응시한다.
다시, 여기서 이들이 바라보는 건 정확히 무엇인가? 벽을 부순다는 자각 없이 벽을 부수는 아이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영화가 다루는 아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살펴야 한다.
쥐, 난쟁이, 룰루, 셸리, 드웨인, 섀도우, 패트리스, 매티와 먼치킨
다리 밑으로 몸을 던진 소년은 Rat, 쥐로 불린다. 그는 귀여운 외모로 거리에서 인기가 많으며 친구 마이크와 함께 권총을 팔아 돈을 번다. 타이니는 거리에서 몸을 팔며 돈을 벌고 그녀의 어머니는 이를 개의치 않는 알코올 중독자이다. 룰루는 자신이 여자라는 걸 굳이 증명하지 않겠다며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고정하지 않는다. 그는 이 때문에 남자들에게 위협을 받지만 굴복하지 않고 거리의 여자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주먹을 휘두른다. 드웨인은 거리에서 시비를 걸 듯 구걸하고 마리화나를 팔지만 감옥에 있는 아버지 면회 날이면 한없이 주눅이 드는 평범한 아이가 된다. 셸리는 어릴 때 자신을 성추행했던 양아버지와 이를 감싸는 어머니를 증오한다. 섀도우와 패트리스, 먼치킨은 여자 아이들에게 매춘을 알선하고 여자아이들은 그런 그들을 비난하면서도 또 가까이 지낸다. 타이니는 랫을, 셸리는 섀도우를, 매티는 먼치킨을 사랑한다. 거리의 아이들은 서로를 해하면서 동시에 서로를 지킨다. 그들은 그렇게 거리에서 살아남는 지혜, Streetwise를 터득한다.
카메라의 위치, 무선 마이크
룰루가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남자무리와 싸울 때, 신호등을 지나가면서 욕설을 내뱉는 그의 모습을 카메라는 먼 거리에서 부감으로 잡아낸다. 흥분한 그의 옆으로 무심히 신호등을 건너는 시애틀 시민들의 모습이 보인다.
여기서 감독이 사용하고 있는 렌즈는 망원렌즈다. 10대들이 구걸을 하고 매춘을 하는 시애틀 파이크 스트리트의 풍경과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제스쳐를 동시에 포착해 내기 위해, 감독은 종종 먼 곳에서 공간을 압축해서 담아낼 수 있는 망원렌즈를 활용한다. 그럼에도 흥분해서 남자들과 경찰들에게 욕설을 내뱉는 룰루의 목소리는 정확히 녹음되어 보는 이에게 전달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 룰루를 비롯한 영화에 등장하는 노숙자 아이들은 옷 속 보이지 않는 곳에 무선 마이크를 착용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화각의 크기뿐 아니라 특정 제스쳐를 통해 확인되기도 한다. 셸리가 섀도우에게 자신을 향한 진심을 물을 때 섀도우가 티셔츠를 슬쩍 들어 올려 옷 안의 마이크를 확인하는 장면. 이때 역시 카메라는 먼 곳에서 둘의 내밀한 대화와 끌어안는 모습을 망원렌즈를 활용해 담아낸다.
1960년대부터 상업 영화에 무선 마이크가 활용되어왔지만, 80년대 노숙자 아이들에게 이는 낯선 장비가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아이들은 주저하지 않고 서로 사랑을 속삭인다. 무선 마이크와 망원 렌즈. 이 두 개의 장비를 통해 감독 마틴 벨은 일종의 자유를 획득한다. 노숙자 아이들의 삶을 꾸밈없이 담아낼 수 있는 자유. 물론 여기엔 아이들의 감독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신기할 정도로 전적인 신뢰는 바로 감독 마틴 벨이 아닌,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메리 엘렌 마크와 아이들의 관계에 기반한다.
사진작가, 메리 앨렌 마크
2015년 75세의 나이로 타계한 메리 엘렌 마크는 빈민가, 사창가, 정신병동을 주제로 사진 작업을 해오던 다큐멘터리 사진가였다. 1983년 라이프 메거진은 미국 시애틀 가출 노숙 청소년의 실태를 취재하기 위해 그녀에게 작업을 의뢰한다. 그녀는 그렇게 처음 시애틀의 파이크 스트리트의 아이들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크라이테리온 채널에 올라온 감독 마틴 벨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녀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인 마틴 벨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들이 만들어야 하는 영화를 찾았다고 말한다. 이쯤에서 그녀의 또 다른 경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진가 메리 엘렌 마크는 루이스 브뉴엘, 프랑수아 트뤼포, 페데리코 펠리니, 아서 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영화 등 100편 이상의 영화에 참여한 스틸 사진가였다. 그녀와 다큐멘터리 감독인 마틴 벨은 언제든 함께 영화를 만들 준비가 되어 있었고 자신들에게 맞는 소재를 찾고 있었다.

1980년대 당시 시애틀은 미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홍보되고 있었다. 표백된 마케팅의 도시에서 완전히 지워진 존재였던 10대 노숙자 아이들은 그녀의 작은 라이카 카메라 앞에서 처음으로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자신들의 모습이 기록되고 있다는 감각을 미리 체험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가설을 세워볼 수도 있지 않을까. 영화 속에서 아이들이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바라본 건, 시야에서 사라진 메리 앨렌 마크를 찾기 위해서였다고.
라이프라는 거대한 잡지사의 모델이 되었던 아이들은 이제 영화의 주인공이 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기도, 자연스럽게 렌즈를 바라보기도 했던 그들은 당황했을 터이다. 메리 엘렌 마크가 사진 모델로서 자신들을 찍는 방식과 그녀의 남편 마틴 벨이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자신들을 찍는 방식이 사뭇 달랐기 때문에. 메리 엘렌 마크는 사진가로서 거리의 사람들을 찍을 때 망원 렌즈를 쓰지 않는다. 그녀가 찍은 인도의 사창가 여성들의 모습이나 파이크 스트리트의 노숙자 아이들은 전부 광각렌즈, 즉 가까이 다가가야만 찍을 수 있는 렌즈로서 촬영되었다. 피사체와 작가의 거리가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을 정도로 인접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인 마틴 벨은 광각 렌즈로 가까이서 이들의 모습을 찍다가도, 파이크 스트리트에서 자신의 모습으로 있는 아이들의 제스처를 담아내기 위해, 카메라 멀리서 이루어지는 그들의 사적인 대화와 표정을 포착하기 위해 망원 렌즈를 활용한다. 아이들에게 무선 마이크를 채우고 멀찍이 떨어져서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늘 자신에게 가까이 붙어 있던 카메라가, 그 카메라 뒤에 있던 사람이 어느 순간 멀리 사라져 잘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렌즈의 화각과 죽음
메리 엘렌 마크의 공식 홈페이지에는 「Streetwise(1984)」에서 마틴 벨이 활용한 장비가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Camera: 16mm Arriflex // Lenses: Zeiss 10-100mm, Zeiss 8mm, Schneider 10mm, Angénieux 5.9mm, Canon 300mm
단순히 다큐멘터리 촬영의 기동성을 위해 16밀리 카메라에 줌렌즈를 장착했다고 하기에는 5.9밀리 초광각 렌즈부터 300밀리 망원렌즈까지 꽤 정교한 렌즈 구성을 엿볼 수 있다. 감독이 5.9밀리, 8밀리 광각렌즈까지 선택해야 했던 이유는 거리의 아이들이 좁은 실내로 들어가는 순간이 잦았기 때문일 것이다.
실내 공간은 아이들이 생활하는 버려진 호텔이나 부모와 함께 사는 집이기도 하지만, 드웨인에게는 아버지가 갇혀 있는 감옥이고 또 자신이 갇혀 심문을 받게 되는 청소년 보호소다. 몸을 좌우로 흔들며 거리를 당당히 걸어 다니고 돈을 주지 않는 시민들에게 시비를 거는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좁은 실내 공간, 추궁하듯 질문하는 사람들 앞에서 광각렌즈에 비친 드웨인은 축 늘어진 채 정적인 제스쳐를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제스쳐는 결국 죽음으로 이어진다.
다큐멘터리의 모든 촬영이 끝난 후 드웨인의 자살 소식을 들은 마틴 벨은 카메라를 들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고 한다. 거리에서 망원으로 드웨인의 활기를 담고, 청소년 보호소에서 광각렌즈로 무기력해진 드웨인을 잡아내던 감독의 카메라는 이제 표준렌즈로 죽은 드웨인의 얼굴을 비춘다.(렌즈 구성에 표준렌즈는 없으니 감독은 표준 화각에 맞게 줌인을 한 뒤, 그 동작을 편집에서 드러냈을 터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기술한다. 드웨인의 죽음이 ‘강력한 결말(extremely dramatic ending)’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자신과 아이의 죽음은 완전히 무관한 것처럼 어떤 열기가 느껴지는 단어들.
공간이 변화함에 따라 인물의 제스쳐가 변화하고 이를 찍어내는 카메라 렌즈의 화각과 구도가 변화한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이는 꼭 순차적인 건 아니었다. 티셔츠 안 무선 마이크를 들여다보는 섀도우처럼 한 때 메리 엘렌 마크의 모델이었던 노숙자 아이들은 기계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갑자기 자신의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폭력의 경험을 말하는 셸리는 기어코 부모의 집을 찾아가 자신을 방치한 날들에 대해 따져 묻는다. 폭로하고 표현하는 주체가 된다. 그들의 뒤에는 자신들을 촬영하고 있는 목격자인 카메라가 있기에 두려움이 없다. 카메라가 인물의 제스쳐를 변화시키고 변화된 인물의 제스쳐가 공간을 변화시켰다. 인물과 공간, 카메라는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한다.
그렇다면 드웨인이 죽음에 이르게 된 이 과정이 카메라와 전혀 무관하다 할 수 있을까?

제4의 벽과 윤리
무선 마이크를 차고 거리를 활보했던 아이들은 드니 디드로가 배우들에게 요청했던 것처럼 ‘거대한 벽’을 상상해야 했을 것이다. 기계 앞에서 기계가 보이지 않는 척, 옷 속 낯선 촉감까지 무시하며 스스로를 내보이는 그들에게 그 벽은 다름 아닌 메리 엘렌 마크가 아니었을까. 사진을 찍고 나서 바로 얼굴을 마주 보았을 사람. 거리의 아이들이 처음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었던 어른. 아이들은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시야에서 멀어진 카메라를 바라본다. 갑자기 사라진 벽을 찾기 위해. 다시 벽을 세우기 위해.
하지만 멀리서 망원렌즈로 그 시선을 마주한 사람은 감독인 마틴 벨이었다. 그 시선으로 영화의 오프닝을 구성한 그에겐 제4의 벽으로서 아이들을 보호해야 할 당연한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마틴 벨은 다큐멘터리가 흥행하자 죽은 드웨인의 삶을 소재로 「American Heart(1992)」라는 극영화를 만들기까지 한다. 메리 엘렌 마크 역시 이 영화의 ‘스토리’라는 크레딧으로 참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화 개봉 이후 룰루는 한 여성을 폭행으로부터 구하려다 22세의 나이에 칼을 맞아 죽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마틴과 메리 엘렌에게 자신이 죽었음을 알리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아이들은 이처럼 카메라 뒤에 있던 두 어른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이는 자신들의 삶을 기록해 줄 카메라를 신뢰한 일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감독은 그들의 생생한 대화와 제스쳐를 성공적으로 담을 수 있었다. 이는 영화에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고 그래서 분명 어떠한 놀라움을 전달한다. 하지만 드웨인의 죽음 앞에서 감독이 취한 렌즈의 화각과 앵글은 감독의 욕망을 드러낸다. 이야기와 캐릭터에 대한 할리우드적 욕망을.
죽은 아이를 찍기 위해 그는 한 발짝도 움직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저 줌렌즈로 줌-인하면 되었으므로. 그러고나서 그 동작 조차 편집에서 드러내버린다. 모든 동작이 효율적이고 편리하다. 노숙자 아이들의 존재를 표백적으로 지워버린 도시 시애틀처럼. 삶으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인 아이를 그는 쉽사리 극화해 버렸다. 그가 쓴 단어대로 ‘엄청나게 강력한 결말’을 위해. 하지만 그 순간 윤리는 부재하고 정지한 모습, 죽음만이 전시된다.
다행히 부부는, 특히 메리 엘렌 마크는 그녀가 죽기 직전까지 아이들의 삶을 좇아가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서 개봉한 「Tiny : The Life of Erin Blackwell(2016)」은 타이니의 본명인 에린 블랙웰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여기서 마틴 벨은 연출로서 메리 엘렌 마크는 제작자이자 출연진으로서 참여했다.
랫은 시애틀을 떠나기 전, 바다를 향해 멀어지는 배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몸을 홱 돌려 카메라를 응시한다. 이때 그의 시선은 카메라 뒤에 서 있는 사람에게 정확히 닿아 있다. 저 멀리서 자신을 찍고 있는 어른에게. 벽을 부수기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보호해 줄 ‘거대한 벽’을 세우기 위해. 서로를 지키는 일의 소중함. 그것이 거리에서 살아남는 방법, Streetwise임을 그는 잘 알기 때문에.
2026년 7월 31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