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겨울
아이들은 빛나는 나무 은각수에 소원을 빌어야 한다. 감정이 없는 자들은 그들을 죽이려 하거나 아직도 우정을 믿냐며 조롱하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건 단순히 살아남는 게 아니다. “생존이 아닌 삶을 살 수 있어”. 그들이 자주 읊조렸던 것처럼 삶을 위해 그들은 선택하려 한다. 자신뿐 아니라 우정을 믿는 동료들을 위해.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두 개의 공간을 위해.
은각수 앞에서 마지막 소원을 비는 순간, 현실의 공간에서 아이들은 디스플레이를 들여다보기를 잠시 멈추고 허공을 바라보며 프레임 너머의 공간을 상상한다. 이때 프레임 너머의 공간은 외화면이 아닌 또 다른 차원의 공간이다. 스스로 만들어낸 규칙이 작동하는 디스플레이 속 공간. 그들은 두 공간에서 다른 옷을 입고 있고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한쪽의 공간이 다른 쪽의 공간을 배척하거나 우위를 갖지 않는다. 그들은 두 곳 모두에서 하나의 고민을 하고 하나의 선택을 내려야 한다. 아이들에게 디스플레이 속 공간의 위상은 현실과 같다.
다른 공간을 상상하고 하나의 선택으로부터 두 공간 모두가 상호작용하며 변화하는 일. 이는 D.W. 그리피스의 <편협>에서도 제기된 문제다. 남편을 죽인 여자가 자신의 죄를 뒤집어쓴 남자를 상상할 때 그녀 역시 허공을, 프레임 너머를 바라본다. 이때 교차편집되어 제시되는 공간은 외화면이나 심리적 공간이 아닌 남자가 죄수복을 입고 교도소 복도를 걷는 공간, 동일한 위상의 공간이다. 서로 다른 현실 그러나 동일한 위상의 공간이 상상력을 매개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력은 결국 남자를 살려내며 여자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고백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한다. 단순한 생존이 아닌 삶을.
디스플레이라는 공간은 2010년대 이후로 우리가 늘 존재하는, ‘생존’하는 공간이었으나 영화에서는 적극적으로 외면 당했던 공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재훈의 <에스퍼의 빛>에서 아이들은 그곳을 구체적으로 상상해내고 살아가며 나아가 그곳에 살고 있는 자신과 공간을 모두 변화시킨다. 다른 공간을 구체적으로 상상해내는 일. 그로부터 자신과 공간 모두가 변화하는 일. 100여년 전 그리피스로부터 내려온 교훈을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다. 디스플레이 앞에서 프레임 너머를 바라보고 상상하며, 빛나는 네모난 화면을 손끝으로 터치하며 우리에게 가능한 세계를 활짝 열어보인다.
2026년 9월 6일
